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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100프로 응답받는 기도 by 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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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100프로 응답받는 기도 by 준초

질병과 경제적 파탄, 실직, 배우자와 자녀 문제 등 고난은 가지각색으로 찾아온다. 그 고난이 크든 작든 누구에게나 각자의 수준에 맞는 절대치의 고난으로 온다. 그러므로 나의 고난은 하나님이 알맞게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육이 무너지지 않으면 영이 세워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이 사람한테는 자녀 고난이, 이 사람한테는 돈 고난이, 이 사람한테는 남편 고난이, 이 사람한테는 병 고난이 필요해’ 하고 알맞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각양각색의 사건들을 만나는 분들이야말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분들이다. 그런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을 이룰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얘, 그래도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고 하신다. 고난과 시험이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고,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된다고 한다(약 1:2-4).

비록 해석이 안 되는 시련이라 해도 그 과정을 지나야 인내가 이뤄진다고 한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내를 대충 이루라 하지 않고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인내함으로 그 시간을 견디다 보면 내공이 쌓이고 혈기가 나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아, 내게 온 이 시험이 믿음의 시련이구나. 그래서 내 내면에 인내를 이루게 해 주시는구나. 그러니 온전히 기뻐해야겠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정말 이겨 내기 힘든 고난 가운데 있어도 그것 때문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느 누구보다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교회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고 변화시켜 주신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에 귀 기울이실 수밖에 없다.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길다 해도 300년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믿음 때문에 핍박받는 중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 중에도 이렇게 큰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나를 통해 이루실 역사가 크기 때문이다.

내 환난이 감해지려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기도에 힘써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찾아가서 위로하며, 소망과 비전을 주고, 도움을 주고, 그 투병중인 모습을 통해 성령의 얼굴을 보이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극복하는 일이다.

의인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 이것을 뒤집어서 해석하면 ‘죄를 감추어 두고 드리는 기도는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다’가 된다.

하나님은 바람, 지진, 불 가운데서도 말씀하시지 않다가 나중에야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다(왕상 19:12). 엘리야는 그 음성을 듣고 나서야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교만과 아집을 내려놓았다. 비로소 ‘나는 통로일 뿐’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는 목적은 오직 하나, 나를 낮추고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남편을 이기고, 아내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내가 치러야 할 전쟁의 목적이 아니다. 자녀가 정신 차려서 공부하도록 다그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 아니다

오로지 나의 거룩을 위해 나를 연단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그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러므로 세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우며 기도해야 한다.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성이라 할지라도 그저 순종하며 도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그러고 있으면 드디어 나의 칠 일째 새벽이 온다.

이전의 나는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하는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온갖 이생의 자랑을 끊을 수 없어서 고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통스러운 사건이 찾아와도 슬퍼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제라도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씀이 이해되길 원합니다.

고통과 슬픔의 사건들이 나와 함께 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이고 사랑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이 고난 가운데서 내 죄를 보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 뼛속 깊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 고난 때문에 기도에 매달리게 하옵소서. 그 간절한 기도로 인해 결국 많은 사람이 살아나는 영광을 허락하옵소서. 내게 주신 이 고난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임을 깨닫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내가 끊기 힘든 세상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그 유혹을 끊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음 생활을 함으로 인해 받은 고난은 무엇입니까? 내 욕심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난은 무엇입니까? 그 고난 때문에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밉지만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의 상한 마음을 바꿔 주신다. 미운 너보다 너를 미워하는 나의 죄를 회개하게 하신다.

미운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 하려면 그 사람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지혜가 생긴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 못할 인간’이라고 욕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좋아하는 음식도 대접하고,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같이 누워서 뒹굴기도 해야 한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기뻐 날뛰지 않고, 오히려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았다.
비록 그의 악은 심판을 당할지라도 의로운 부분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근거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도 거룩이어야 한다. 행복이 아닌 거룩의 기준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자기 자신을 직시하지 않고 무조건 매달리기만 한다고 응답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결코 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에 속지 않으신다. 그것은 벌받을 행실이고 행위라고 하신다.

내 죄를 알고 애절함과 절절함으로 무시당함과 하나님밖에 바랄 수 없는 처지를 겸손하게 고백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알기 원하시기

다. “너희들도 더 이상 떠들지 말고 조용히 침묵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다. 최후 통첩인 셈이다.

내가 너무 돈을 좋아해서 이 남편을 만났습니다” 하고 통곡하며 회개기도를 한다. “하나님, 돈도 없는 남편이 나를 속였습니다. 저 사기꾼한테 당했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돈에 너무 치우치니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하면서 인생을 해석한다.

육이 조금이라도 무너지지 않으면 그곳에 영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심판이 필요하다. 그 심판으로 육은 죽고, 영이 살아난다. 로마 같은 강퍅한 사람도 그 심판으로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힘든 것은 고통스런 환경 때문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울며불며 기도해도 내가 평안하지 않은 이유는 말씀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으로밖에는 기쁠 일이 없으니 오직 환경에만 집착한다. 그러니 말씀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실 때다. 하나님은 나의 간절한 기도가 금향로에 가득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침묵하며 기다리신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내 죄를 보고, 내 부패와 가증함을 보면서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 기도만이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에 의지하며 말씀을 따라 살면 두려울 것이 없는데, 들으라는 말씀은 듣지 않고 사건에만 매달려서 날마다 놀라고 넘어진다. 그래서 날마다 하늘만 쳐다보고 주님께 매달려 “주세요, 주세요”만 부르짖는다.

“큰 차가 있어야 해, 집이 있어야 해, 애가 대학에 붙어야 해, 업신여김을 받고는 못 살아” 하니 자유함이 없다. 성령이 없으니 예수님을 믿어도 세속에 빠지고 경건에 빠진다.

성령이 없는 기도는 육적일 수밖에 없다. 헛될 수밖에 없다. 응답은 없고, “왜 하늘만 쳐다보느냐?”는 책망만 들을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야 침묵으로 일관하신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침묵조차도 기도 응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정욕으로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린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분노가 뒤따른다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불쌍한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라도 기도 응답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늘 함께해 주옵소서. 내 모든 정욕과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지켜 주옵소서.

주님은 유창한 기도보다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 어떤 고난에 빠져도, 어떤 사건을 겪어도, 무슨 말을 들어도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도우소서” 하는 간절함이 있는가를 보신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녀에게 그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주님은 이것을 보고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인정하셨다.

가나안 여인은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서 믿음의 모범, 인내의 모범, 겸손의 모범, 그리고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살피지 않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도우심을 구했다.

나의 간절함을 보시려고 침묵과 냉대의 훈련을 겪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유창한 기도가 아니라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큰 믿음이다. 자기의 비천함을 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다.

그래도 나는 사랑을 붓기만 하면 된다. 그다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 용서하기도 힘들었는데 끝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기브온을 돕기 위해서는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내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

남편이, 아빠가 교회 가는 것을 너무 핍박한다면 “주님, 아빠가 마음을 돌리고 예수님 믿을 수 있도록 제가 공부를 잘해야겠습니다. 이 시험을 잘 보게 해 주세요!”,

”, “주님, 남편이 예수 믿기 위해서는 제가 집안일을 잘해야 합니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병을 고쳐 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한다.

내 가정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도 바쁜 마당에 ‘왜 상관없는 일에 돈을 써야 돼? 시간을 써야 돼?’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말도 안 되는 사람 때문에 내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그러나 희생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주님은 기브온이 원수가 아니라고 하신다. 나를 속인 남편이 원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수는 내 남편, 내 자녀가 아니라 그들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는, 싫어하는 내 마음이다.

부도가 나도 내 속의 욕심이 원수이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내 속의 분노가 원수다. 가장 큰 원수는 내 안의 유혹과 탐심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적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다.

우리에게 기브온을 주시므로 회개할 거리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속고 속이는 사건 속에서 먼저 처리되어야 할 내 속의 원수, 즉 욕심, 분노, 시기를 깨달아야 한다. 기브온이 변하는 것보다 내 속의 악을 깨닫는 것이 진정 축복임을 믿어야 한다.

목소리는 내 주장을 내세우고, 배우자를 욕하고, 불평할 때 쓰는 게 아니다. 나의 기브온을 위해 기도할 때, 기브온을 살리기 위해 부르짖을 때 써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나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전무후무한 100프로 응답으로 나를 위해 싸워 주신다.

자식이 우상이기에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해 보려고 자식과도 피 터지게 싸운다. 그러나 세상 우상을 향한 기도는 응답이 없다. 우상은 응답하지도 않고, 응답할 수도 없다.

예수 믿으면서도 이런 우상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새벽기도에, 철야기도에,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한다. 자식의 입시와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 부르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은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지 절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엘리야는 열심과 광란으로 기도한 바알 선지자들과 달리 말씀에 의지하여 확신에 찬 기도를 드렸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응답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내가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말씀이 점차 내 인격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 명령을 따라, 말씀을 따라 그대로 행해야 헛된 야망을 품지 않게 되고, 그럴 때 기도하면 응답받게 된다.

죽을 때까지 멍에 메는 길을 가련다’ 하고 집에서는 말씀에만 매달리고,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전도만 했다. 그러자 환자들이나 병원 직원들이 명색이 원장 사모인 나를 하찮게 여겼다.

멸망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회복이 되고, 또 멸망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들을 통해 영이 세워지고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믿음이 자라면 멍에를 메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다. 고난이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너무나 달라서 먼저 멍에를 메고 그 멍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멍에를 메고 부르짖어야 그 기도를 들으시겠단다(렘 29:12).

나를 핍박하는 아무개가 잘되게 해주세요” 하며 멍에를 잘 메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신다. 포로 생활도 해 보고, 멍에도 잘 메고 있는 사람의 기도는 확실히 뭔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자꾸 돈을 찾는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찾으려고 기도한다. 눈앞에 ‘삼삼하게’ 어른거리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내 욕심들이다. 돈이고 야망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슨 말씀만 하면 못 들은 척한다

100억 탈세하고 10억 헌금하러 교회에 와서 겨우 안도의 숨을 쉰다면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다. 일주일 동안 가족에게 별짓 다하고는 교회에 와서 안도의 숨을 쉰다면 그곳이 강도의 소굴이다.

예수님이 내게 임하시면 내가 바로 성전이다. 하나님의 전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떠한가?

내 안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 쌓여 있지는 않은가? 돈을 좋아하고, 악과 음란이 있고, 술 담배를 즐기고, 나쁜 생각, 나쁜 가치관을 잔뜩 쌓아 놓은 내 성전에서 기도하면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

이렇게 더러운 성전에서 기도하면 응답은커녕 주님이 둘러엎으신다. 내가 먼저 둘러엎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둘러엎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가 막힌 일을 당했다면, 나 대신 주님이 둘러엎으셨음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저 100프로 기도 응답받는 조건은, 먼저 내 죄를 보는 것이고, 그 죄를 깨끗이 둘러엎는 것이다.

죄 중에 있으면 너무 두려워서 예수님이 안 보이고 상실감으로 기도가 막힐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더욱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효과적으로 도우심을 믿어야 한다(롬 8:26).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바다를 건너다 폭풍을 만나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목적지로 가게 되어 있다. 애굽에서 출발해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지진이 있고 홍수가 있어서 다시 돌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성령이 우리를 효과적으로 도우심으로, 택한 사람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게 되어 있다.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고, 주님의 뜻을 묵상하게 되었다. 어떤 사건이 와도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야’ 하고 해석하게 되었다. 구속사적인 구별된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상처를 입은 것은 절대로 누구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붙여 준 사람일 뿐이다

압살롬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미워하는 것, 집착하는 것을 버리라는 뜻이다. 이것을 버리지 못하면 기도가 되지 않는다.

압살롬은 너무나 악해 보이지만 그 또한 부모로부터 상처를 물려받은 너무나 연약한 자였다. 이렇듯 사람을 봐도 사건을 봐도 항상 구속사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다니는 동안 그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압살롬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죄를 보며 피눈물 나는 기도를 했다. 압살롬을 죽여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내 속의 압살롬을 물리칠 수 있도록, 또 내 속에 있는 끔찍한 다말의 사건을 잊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

구속사를 알면 그 구속사 속에, 성경 속에 내가 보인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야곱의 인생에서 나를 보게 된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는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곧 내 삶의 결론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모르고는 구속사의 기도를 할 수도 없고 응답을 받을 수도 없다. 구속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을 읽고 깨닫고 묵상하는 기도인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내가 기도해야 할 것들이 저절로 채워진다. 정함이 없이 ‘달라, 달라’고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래서 기도의 목적도 거룩이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고 했다.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감사와 깨어 있음은 기도를 떠받치는 두 기둥

그저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이다. 이것이 최고의 기도다. 그 기도만 반복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남을 배려하게 되고 그러다 남을 위해 중보기도까지 하게 되면 내 기도 제목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걸 알게 된다. 기도에 열중하다 보면 세상이 점점 멀어지고, 정욕을 점점 내려놓게 되고, 죄를 지을 시간이 현저히 줄어드는 은혜를 맛보게 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하면 가지치기해야 할 나의 교만이 보이고 내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중세의 베네딕트 수도사는 성직자로 살기 위해 안토니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수도원장으로부터 “하루 종일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니까 밑천이 떨어졌다.

기도는 이런 것이다.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기도다.

평소에 하나님과 자꾸 만나 친밀한 관계가 되면 부도가 나도, 아내가 집을 나가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구구절절 기도할 필요가 없다. 평소에 하던 대로 기도하면 된다. 날마다 만나 절친하게 지낸 하나님인데 무슨 설명을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 주세요” 하면 “알았어”가 되는 것이다

큰 믿음, 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감사함으로 받는 큰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내 비천함을 알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원합니다. 날마다 일방적인 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사건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깨닫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응답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믿음의 진보를 허락하옵소서. 믿음의 진보야말로 최고의 기도 응답임을 맛보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저를 대신하여 주님이 둘러엎으셨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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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눈물을 흘리든 안 흘리든, 소리를 지르든 안 지르든 하나님은 내 속의 진실을 보실 뿐이다.

혈통과 성품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 되어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면 큰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혼자 애쓰기보다 ‘우리’가 되어서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처럼 아버지를 높이고 사랑하면 나의 거룩도 저절로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그 뜻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우리의 고통은 언젠가는 다 지나가므로 그 고통을 부여잡고 묵상하면 안 된다. 우리는 환경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인식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고통으로 인한 나의 필요보다, 나를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기도해야 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쁜 일뿐만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알고 잘 받아들인다

그리고 직업을 바꾸든지 장사를 계속하든지 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기도 부탁을 했다.

이것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고백이다. 나를 높이고 나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음식과 건강과 나라와 집과 날씨와 가족,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영적 태연함을 유지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겪고 나서야 집사님은 그동안 세상에서 성공해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기 원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고 평생 먹고 살 양식, 주위에 자랑하고 싶을 만큼 풍성한 양식을 쌓아 놓고 살기를 바란 진짜 속마음

그렇다. 우리는 가난하면 무력해지고, 부유하면 나태해진다. 그러니 현재에 만족하고, 내일을 위해 쌓아 놓을 양식이 아니라 오늘 일용할 양식만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진정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나만 먹기 위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다.

영육이 다 마찬가지다. 양식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나고 쓰러지는 것처럼 말씀이 없으면 영이 무너진다

나를 해친 사람에게 원수 갚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용서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지은 죄에 대한 분노에 내가 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뭔가 도움을 받거나 혜택을 입었으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예의인데, 우리는 너무 감사를 잊고 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을 잊을 때가 참 많다.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일수록 더 그렇다. 뭔가 도움을 받거나 혜택을 입었으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예의인데, 우리는 너무 감사를 잊고 산다.

기도 응답으로 얻은 아들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찬양했다. 찬양을 하면서도 한나는 아들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기쁨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밤낮 찰싹거리는 바닷가에서 병 낫기만을 바라며 요동하지 말고, 엄청난 은혜 가운데 요동치 않는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나 그 병 때문에, 그 고통 때문에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을 치유해 주신 주님에 대한 감사는 영원하게 된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주님은 영원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심을 절실히 깨닫게

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품는 것,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다. 못하실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다.

한나는 또한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하며 찬양해야 한다.

나는 험악한 이 세상에서 30대 후반에 혼자가 되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정말 불꽃처럼,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너무 감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이어서 너무 감사해요.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 겸손함으로 나아가면 내 인생에는 그저 감사하고 찬양할 일밖에 없다.

신앙생활이 건강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애착관계가 형성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회피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하나님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나는 비록 별도 달도 따다 드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뭔가 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건강한 애착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래야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오는 인생이 될 수 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 늘 예민하게 반응했다. 말끝마다

내 힘으로는 되는 것이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기뻐하라고 하신다. 그래야 감사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그 사이에 “기도하라”가 있다.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기도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감사하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재판관도 과부가 번거롭게 하면 그 원한을 풀어 준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 않겠느냐’면서 ‘속히 풀어 주실 것이므로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눅 18:1-8).

어찌 보면 과부와 같은 환경이야말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환경이다. 무시받는 처지에 있으면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부가 최고의 축복이고, 무시받는 환경이 최고의 축복이다.

쉽게 낙심하고 쉽게 무너져 내린다. 절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는 원천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를 붙잡고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붙어도 감사, 떨어져도 감사” 하고 키우면 버릴 것이 없는 자녀, 쓰임 받는 인생이 될 것이다.

자기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회개’를 말한다. 내 육적인 수치를 오픈하는 것이다. 더러워진 두루마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빨 수 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며 인생의 더러움을 내어 놓고 고백하는 것이 정결케 되는 비결이다.

회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이다. 뉘우치는 인생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
죄를 고백하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다(약 5:16)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내 죄를 보고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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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욕심과 가증함을 내어 놓고 단 위에 올라서서 자복하면 손가락질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된다.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다. 고난 ‘때문에’ 기도했기에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이다.

세상 것을 두려워하면 기도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무엇이 두려운가? 내 두려움의 근본은 무엇인가? 돈 때문인가? 자식 때문인가? 질병 때문인가? 그러나 내 속의 욕심만큼 두렵고 무서운 앗수르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회개하며 기도한 히스기야였지만 그는 결코 세상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앗수르 왕이 주변 국가를 다 물리쳤지만, 그들이 이긴 것은 “신이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뿐”이라고 했다(왕하 19:17-18).

하나님, 제가 연약하기에 무너졌습니다” 하고 성전으로 나아간다. 내 수치와 조롱받은 것 다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 저 무너졌습니다. 저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서 드리는 한 사람의 서원기도,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는 기도는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

내 죄란 어떤 거창한 집회를 가서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한나처럼 첩의 질투를 오래 받다 보면 내 죄를 보고 내 인생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괴롭히지 않으면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가 버릴 염려와 근심을 묵상하고 있다면 그것을 자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막는 내 속의 염려와 근심을 자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송축과 찬양이다.

상황에서도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100프로 옳으심을 선포하는 것이 자복하는 기도의 본질이며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들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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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예수회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지평선 안에서의 사소한 일상들을 실행하는 아량의 미덕에 초점을 맞추고, “식별은 시간이 걸린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항상 “식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식별은 “당신이 나중에 하려던 것을” 즉시 할 수 있도록 촉구하며,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들을 의심하게 한다”고 교황은 덧붙였다. “저는 항상 처음의 결정을, 다시 말해 제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하는 경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의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