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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려두기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by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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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려두기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by 김지원
보수/진보에 대한 축구경기의 비유

커다란 축구 경기장에서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보수 팀과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진보 팀이 축구를 한다. 보수 팀의 선수들은 열한 명인데 공격수늨 다국적 기업, 대기업, 중소기업 이렇게 셋으로 거인이다. 특히 다국적 기업은 키가 너무 커서 얼굴이 구름까지 닿은 까닭에 잘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은 잘생기고 덩치가 산만 하지만,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고 빠르다. 중소기업은 조금 작은 거인인데 평범하다. 수비수들은 보수 미디어들로, 목소리가 크고 잘생겼다. 골키퍼는 보수 정당으로, 덩치가 크고 골을 잘 막기로 소문났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으로도 소문이 났다는 게 문제다.
반면 진보 팀은 좀 안쓰럽다. 공격수와 수비수를 합쳐서 천 명 정도 되는데, 하나같이 말도 안 되게 작고 왜소하고 굼뜨다. 진보 팀의 공격수들은 대부분 노동자다. 이들은 인원이 많고 가끔은 잘 뭉쳐서 보수 팀의 공을 빼앗기도 하지만, 곧 서로 의심하고 공을 패스하지 않아 불신과 혼란으로 우왕좌왕할 때가 많다. 수비수 중 진보 언론들은 목소리가 작고 검소하게 생겼다. 골키퍼는 진보 정당으로, 덩치가 작은데 능력이 좋고 많이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기분열적인 특성이 있어서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고 혼자 심각해하는 동안 글을 못 막을 때가 많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
응원석을 가득 채운 무수히 많은 관중은 대부분 진보 팀의 선수들과 외모가 매우 닮았다. 사실 진보 팀의 선수들과 관중들과의 관계는 지인, 친구, 가족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진보 팀의 지인들, 친구들, 가족들인데도 불구하고 절반 정도의 관중은 잘생긴 보수 선수들의
팬이 되어 보수 팀 응원석에 가서 응원을 한다는 것이다. 진짜 보수 팀의 관중은 잘 마련된 로얄석에 있다는데,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그들을 본 사람은 없다.
경기가 시작되면 가관이다. 거대하고 발 빠른 보수의 꽃미남 거인 공격수들이 공을 드리블하며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진격하는 동안, 거인의 발에 진보의 선수들이 밟혀 죽는다. 진보의 선수들이 우왕좌왕 밟혀서 죽어나가는 아비규환이 펼쳐지는데, 진보의 수비수들이 반칙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관중석에서 보면 진보의 수비수들이 뭔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듯한데, 그 모습만 작게 보일 뿐 별로 관심이 안 간다.
더 큰 문제는 관중에게 있다. 진보 쪽 관중이건, 진보 쪽 지인들이면서 보수 쪽 응원석에 앉은 관중이건, 축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기가 앉은 좌석을 지키려고 서로 경계하고 옆 사람을 의심할 뿐이다. 어떤 관중은 1분마다 일어나서 자신의 좌석을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고 마른걸레로 다시 닦기를 반복한다. 어떤 관중은 자신이 앉은 좌석이 앞자리에 해당하고 특별히 좋은 자리에 해당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바쁘다. 어떤 관중은 옆 사람과 대화하기에 바쁜데, 관중 중에서 누가 선수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소리 지르면, 왜 경기장에서 시끄럽게 구냐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무례하고 재수 없다고 생각한다. 경기 장의 가장 뒤쪽에 앉아서 경기장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은 그나마 좌석이 생긴 것에 위안하며, 졸거나 유일하게 보이는 거인 공격수들의 모습만을 가끔 보고 있다. 이들은 경기장이 잘 안 보이므로 경기를 하는지 잘 모르며, 그저 잘 생긴 보수 공격수들이 잘생김을 뽐내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줄만 안다.
보수 팀 거인 공격수가 골문 앞에 서서 슛을 할 모양이다. 진보 팀은 아직도 아비규환이다. 진보 팀 수비수들은 지쳤다.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건 골키퍼인데, 진보 팀 골키퍼는 뭔가 혼자 심각하다. 골대 가운데 서서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오른쪽 뺨을 때리고 반대로 해보기도 한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보수 팀 공격수가 결국 슛을 하고, 골은 심심하게도 골문 안으로 멋지게 꽂힌다. 경기가 정말 재미없다. 보수 팀 수비수들은 공격수의 멋진 세레머니를 위해 경기장을 이미 잘 꾸며놓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공격수들이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와 멋지게 세레머니를 하고, 수비수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른다. 수비수들은 응원석이 무관심하면 직접 응원석으로 올라가 박수를 치고, 다시 급하게 내려와서 환호하기를 반복한다.
진보 진영은 골을 먹은 후가 더 흥미롭다. 골이 먹혔다는 소문이 돌자 그때까지 무관심하던 관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하면서 경기장에다
물병을 던지고 선수들을 욕한다. 경기장 내의 선수들간에도 서로 싸우고 헐뜯는 시간이 벌어진다. 최종 책임을 무능한 골키퍼가 지기로했는데, 혼자 말하고 싸우고 심각했던 자아분열적인 골키퍼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정중한 태도로 돌변해서 선수들과 관중에게 사과를 한다. 그러곤 이름을 한번 바꿔보겠다고 말한다. 관중들도 그게 정말 책임을 진 건지 아닌건지 헷갈리지만, 뭐 특별히 다른 방법도 없으니 그러려니 하면서 또 자기 좌석에 관심을 쏟는 일로 돌아온다.
뭔가 해결된 것 같다고 숨을 돌리는 사이, 저 멀리서 보수팀 공격수들이 다시 공을 몰고 달려오기 시작한다.